국내 브랜드 이야기

나만 몰랐던 첨단 방산 업체 '노루페인트'

Know Your Impact 2024. 9. 18. 15:56

노루페인트 로고

1. 노루페인트·대한항공 '스텔스 도료' 개발 전략적 파트너십

 

페인트 산업은 전통적인 화학 산업으로 신기술 접목한 특수도료를 상용화하기 쉽지 않지만 상용화에 성공하면 높은 부가가치를 누릴 수 있다.  2023년 노루페인트는 항공기 등에 적용할 스텔스 도료 등 응용 소재 개발을 위해 대한항공과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었다. 스텔스 도료는 아군의 항공기가 레이더에 탐지되지 않도록 돕는 기체 표면에 도포하는 특수 도료다.

 

노루페인트는 2000년대부터는 국방과학연구소와 손잡고 스텔스 도료를 개발해 왔다. 양사의 스텔스 도료 기술 개발 협력은 대한항공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국책과제 '최신 탐지 위협 대응 무인기용 메타구조 스텔스 융합 기술' 연구의 일환이다. 노루페인트는 '불연속 영역 산란 저감 소재' 개발에 착수했으며, 총사업비는 441억 원 규모다.

 

노루페인트는 1988년 네덜란드 화학그룹인 악조노벨(Akzo Nobel)로부터 항공기용 도료 제조기술을 도입한 후 자체적으로도 연구·개발해 왔다. 1992년 개발에 성공한 내열도료는 우리나라 첫 인공위성인 '우리 별 1호'를 도장하는 데 사용했다. [1]

 

네? 스텔스요? 인공위성? @_@

2023년 6월 28일 출고된 KF-21 보라매 시제 6호기의 모습
그림1. 2023년 6월 28일 출고된 KF-21 보라매 시제 6호기의 모습

 

! 번외로 잠시 스텔스 도료에 대한 이야기

 

스텔스 도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레이더 원리에 대한 이해가 기본적으로 되있어야 한다. 레이더 원리는 간단히 보자면 에너지 반사작용(이해를 돕기 위한 용어)이라 생각한다면 된다. 빛, 전파, 소리 등 각종 진동 에너지는 일정한 물체에 충돌하면 진동이 전해지면서 그에 대한 복사에너지가 방출되거나, 또는 진동효과가 반사 굴절등의 형태로 보전된다. 레이더는 전파를 발사하여 대기 중으로 날려 보내면 대기 중에서 반사된 에너지의 크기 파장 그리고 각도 등으로 대기 중에 있는 물체를 위치를 알아내고 더 나아가 식별까지 하는 것이다. [2]

위에서 말하였듯이 전파의 반사를 통하여 그 위치를 알아내는 레이더를 피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 스텔스 도료이다. 크게 두 가지 방식을 취하는데, 첫 번째로 스텔스 도료는 레이더 파장(전자기파)을 차단하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스텔스 도료의 표면은 평평하고 매끄러워서 레이더 파장이 반사되지 않고 직진하여 표면 내부로 들어가 차단되는 원리를 사용한다. 두 번째로 적외선 차단을 위해 스텔스 도료의 표면을 발열시켜 나오는 적외선 파장을 억제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표면의 흑연처럼 작동하는 흡열 물질이나 고열 발생을 방지하는 특수한 보강체를 추가하여 표면 열화 및 발열을 억제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2. 노루페인트의 역사

 

노루페인트의 옛 로고
그림2. 노루페인트의 옛 로고 (저는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이 로고가 더 마음에 들어요!)

 

1945년 창업된 NOROO는 지난 70여 년간 페인트, 잉크, 수지, 플라스틱 산업 등 다양한 사업분야에 걸쳐 영향력을 발휘하며 대한민국 산업발전의 역사를 이끌어 왔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종합 정밀 화학 기업으로 거듭난 NOROO는 2006년 6월 1일, 투자사업부문 ㈜노루홀딩스와 제조판매 사업부문 ㈜노루페인트를 분리해 고유사업 부문에 전념토록 하였다.

 

㈜노루홀딩스는 자회사의 주식소유를 통해 효과적인 출자 및 성과관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업지주회사로서 단기적으로는 그룹의 위상을 정립하면서 자회사의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정책 및 전략을 개발하고, 경영효율성의 제고와 책임경영체제를 확립을 위해 설립되었다. 현재 사업 영역은 화학, 농생명, 유통, 컨설팅 및 디자인에 이르고 있다. [3]

 

3. 노루페인트 창업주 '한정대' 회장의 생애와 창업 - 나의 조국을 위하여

노루페인트 창업주 한정대 회장
그림3. 노루페인트 창업주 한정대 회장

 

오늘날 글로벌 색채산업의 선도기업으로 성장한 노루그룹의 창업자 한정대 선대회장은 1920년 11월 2일 함경남도 함흥시 서상리 78번지에서 부친 한승진과 모친 임창운의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한 회장의 집안은 조부 한면직 대에 대규모 포목 및 잡화상을 경영하여 이 고장 제일의 재산가로 꼽힐 만큼 살림이 부유하였다. 그러나 부친 한승진 대에 이르러 새로운 사업으로 수산업에 진출했다가 큰 손해를 본 후 가세가 기울어졌다.

 

그의 성장기에는 한 회장의 외삼촌 임국정 의사의 독립운동 탄압자금 ‘15만 원 탈취사건’이 있었다. [4]  거사에 성공한 임국정 의사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항일무장투쟁에 필요한 무기를 구입하던 중 밀정 엄인섭의 밀고로 윤준희, 한상호 등과 함께 체포되어 1921년 8월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27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또 한정대의 친형 한정빈은 1928년 함흥고등보통학교 졸업을 반년 앞두고 전교생을 이끌고 독립만세 시위 운동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일경에 쫓기다 불의의 사고를 당해 유명을 달리하였다.

 

친형의 참변은 소년 한정대의 앞날에 큰 영향을 미쳤다. 큰 아들의 죽음이 학교 교육 탓이라고 여긴 부친은 소년 한정대를 상급학교에 진학시키지 않았다. 그리하여 소년 한정대는 보통학교를 마치자마자 함흥시에 있는 일본인 의복상점에서 점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소년 한정대는 이 상점에서 3년 동안 성실하게 일해 주인의 신임을 얻었고 훗날 독자적인 사업 추진의 기반이 된 치밀한 상술도 익혔다. 더욱이 주인 아들과의 각별한 우정이 인연이 되어 주인의 도움으로 일본에서 상급학교 진학의 기회까지 얻게 되었다.

 

일본인들의 멸시와 차별 속에서도 유학생활을 꿋꿋이 이어 나가면서 청년으로 성장한 한정대 회장은 1941년 3월 오사카 공업고등학교 응용화학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한 회장은 오 사카 소재 후지화학연구소에 화학기사로 취직하여 훗날 잉크 회사 창업의 씨앗을 얻게 되었다. 한정대 회장은 25세가 되던 해에 해방을 맞아 귀국하였다. 그는 해방된 조국에서 어떻게 자신의 앞날을 개척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중 서울에 살던 외사촌 형인 임병철을 찾아갔다.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신문의 복간을 준비하고 있던 임병 철은 이렇게 조언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타고난 자질과 능력을 살릴 수 있는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네. 자네는 일본에서 잉크 제조기술을 습득했으니, 나라를 건국해가고 있는 지금 그것을 살리는 길이 최선이 아닐까 하네. 더욱이 건국에 있어서는 문화교육이 중요한데, 문화교육에서 절대 필요한 것이 출판이요 출판은 잉크 없이는 할 수가 없네. 만일 자네가 새 나라의 새 일꾼을 기르기 위해 필요한 잉크를 만들어 낼 수만 있다면 그보다 큰 문화적 공헌이 어디 있겠는가.”


 

한 회장은, 신생 조국에 이바지할 수 있는 길은 역시 임병철이 조언한 대로 자신의 전공을 살려 근대산업 발전의 원동력이 되어온 화학제품을 생산하는 일이라고 판단하였다. 해방된 조국의 언론계와 출판계는 자유를 되찾자 서적과 출판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인 기술자들이 빠져나간 인쇄업계는 기술부족에 시달렸다. 또한 심각한 인쇄잉크의 공급난으로 국내에 남아 있던 잉크는 부르는 게 값이었다. 한 회장은 마침내 인쇄잉크 제조에 뛰어들 기로 결심하였다. 잉크 제조는 소자본으로도 시작할 수 있어서 당시 맨손이나 다름없던 그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한 회장이 사업에 대한 나름대로의 철학을 ‘사업보국(事業報國)’에 둔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는 시대와 국민이 필요로 하는 것을 만들어 공급하는 일, 즉 생 산공장의 운영을 통해 나라의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사업철학을 확고히 세우고 일생동안 이 철학에 입각하여 기업을 경영하였다. 훗날 그는 다음과 같이 회 고한 바 있다.

 

“기업은 소유나 부의 축적이 목적이어서는 안 되며 국가와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 를 추구해야 한다. 따라서 기업은 사소한 이익보다 국가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보다 큰 목표를 지향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기업인은 국가 경제부흥에 이바지할 수 있는 제조업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대한민국 최초의 잉크제조 회사 '대한오브세트잉크'
그림4. 대한민국 최초의 잉크제조 회사 '대한오브세트잉크'

 

1945년 10월, 한 회장은 이렇게 마련한 작은 목조건물에 ‘대한오브세트잉크’라는 간판을 걸었다. 이 건물은 회현동 1가 34-4의 대지 33.1평과 31-4의 대지 7.1평에 6.7평 규모의 사무실 한 채와 27평 규모의 창고 한 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회사가 해방 후 한국인의 손으로 설립한 최초의 잉크회사였다. 그때 한정대 회장은 이 나라 최고의 잉크회사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담아 회사 이름의 머리에 ‘대한’을 앞세웠다.


 

1945년 12월 10일 ‘을 5원권’과 ‘을 10원권’이 인쇄되기 시작했고 이후 국정교과서, 관공서 인쇄물에도 대한오브세트잉크가 사용되었다. 대한잉크의 기술력은 조선은행권을 인쇄하면서 공인을 받기에 이르렀다. 해방 후 조선은행권은 국내 조선 서적에서 인쇄하였으나 인쇄잉크는 일본에서 조달하 고 있었다. 그런데 곧 일제 인쇄잉크의 공급이 끊기면 서 이를 국내에서 조달하기로 하였다. 이런 정보를 입수한 한정대 회장은 조선서적을 찾아가 잉크 납품을 교섭했다. 처음에는 인쇄기술자들이 국산 잉크의 품질을 믿지 못했으나 한 회장의 끈질긴 설득으로 시험인쇄를 실시해 기대 이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리하여 1945년 12월 10일, 구조선은행권의 색채를 약간 바꾼 ‘을 5원권’과 ‘을 10원권’을 시작으로 대한오브세트잉크로 인쇄한 조선은행권이 발행되기 시작했다. 이후 조선서적에서 인쇄하던 국정 교과서, 관공서 인쇄물에도 대한오브세트잉크가 사용되었다.

 

대한오브세트잉크로 인쇄한 조선은행권
그림5. 대한오브세트잉크로 인쇄한 조선은행권

 

4. 6.25 전쟁과 도료 사업의 진출 

 

전후 1953년 정부는 경제부흥 3개년 계획을 세우고 파괴된 산업의 복구에 나섰다. 그러자 일부 인쇄업자와 잉크제조업자들이 정부의 정식 환도에 앞서 서울로의 복귀를 서두르는 등 새 출발의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한편 지난 경험을 통해 잉크 제조업이 성장에 일정한 한계가 있다고 절감해 온 한 회장은 서울로 돌아가는 것을 계기로 잉크 외의 새로운 분야를 적극 모색키로 하였다. 그때 한 회장 이 염두에 두고 있던 새로운 분야는 바로 도료사업이었다.

 

도료 제조는 잉크 생산시설을 그대로 이용할 수 있고 원료도 대부분 같으며 제조기술도 잉크 제조기술의 노하우를 활용할 수 있었다. 한 회장은 1953년 7월 휴전이 성립되자마자 선진국의 잉크와 도료업계를 둘러보기 위한 수속을 진행했고, 3개월 뒤인 10월에 혼자서 유럽과 미국으로 산업시찰을 떠났다.

 

한 회장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지의 인쇄잉크와 도료 공장을 두루 살펴보았다. 그러고 나서 세계 최고의 도료업체인 미국의 셔윈 윌리엄스(Sherwin Williams)를 통해 수지와 안료 등 원료를 수입하는 한편 배합기술 및 선진 기술정보에 대한 지원을 받기로 결심했다. 셔윈 윌리엄스 사장을 만난 자리에서 한 회장은 이런 자신의 뜻을 간곡하게 피력했다. 한 회장의 진지하고 적극적인 자세가 셔윈 윌리엄스 사장을 움직여 대리점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셔윈 윌리엄스사
그림6. 셔윈 윌리엄스사

 

1945년 해방을 전후하여 설립된 우리나라 기업들 가운데는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현실을 고려하여 동물을 기업의 상징물로 삼는 경우가 꽤 있었 다. 한 회장이 선택한 노루도 일반인들이 쉽게 대한 잉크의 제품을 인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한 회장은 노루를 통해 남을 해치지 않으면서 만인의 사랑을 받으며 영원히 발전하는 회사의 이미지를 담아내고자 했다.

 

5. 문래동 사옥 건설과 미 군납 

 

문래동 사옥
그림6. 문래동 사옥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의 체결로 3년간의 6·25 전쟁이 끝났다. 그해 8월 15일 정부의 서울 환도와 함께 폐허가 되다시피 파괴된 한국의 산업시설은 경인지역을 중심으로 복구되기 시작했다. 이 무렵 한정대 회장은 폐허가 된 대한잉크의 공장을 단순한 복구가 아닌 새로운 현대식 공장으로 재탄생시키고자 하였다. 1955년 4월 12일 서울시 영등포구 문래동 4가 44번지의 대지 2,965.1평을 매입했다. 대림천을 끼고 있는 넓은 대지로 공장부지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장마철에 가끔 물난리가 나기는 했으나 대신 풍부한 지하수를 공업용수로 이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부지 매입이 확정되자마자 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부족한 자금 사정으로 전기공사 등 일 부 전문공사만 하청 형식으로 외부 업체에 맡겼을 뿐 대부분의 공사를 직영으로 처리했다.

 

1955년 10월 5일 건평 107평 규모의 잉크실과 24평 규모의 발전실을 준공하고 부분적으로 제품 생산을 시작했다. 이에 따라 부산 범일동 공장의 가동을 전면 중단하고 기존의 생산 시설과 인원을 모두 문래동 공장으로 옮겼다. 문래동 공장의 준공이 가시화됨에 따라 그해 11월 1일을 창립기념일로 정하였다. 문래동 공장의 준공으로 회현동 사무실과 더불어 이원화 체제를 갖춘 대한잉크는 1956년 1월 12일 상호를 ‘대한잉크제조주식회사’로 변경하였다. 

 

도료의 성수기인 봄, 여름, 가을에는 인쇄잉크가 비수기이고 인쇄잉크의 성수기인 겨울과 이른 봄까지는 도료의 비수기다. 따라서 도료와 인쇄잉크를 동시에 생산한다면 항상 성수기의 영업이 가능했다. 한정대 회장은 도료사업 진출의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고 어떤 방식으로 도료업계에 진출할 것인지 검토했다. 그 결과 과열경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는 국내 도료시장에 곧바로 진출하기보다는 일단 주한 미군에 군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기로 하였다. 한 회장은 미국의 셔윈 윌리엄 스사에 미연방규격에 관한 자료를 요청하는 한편 미 8군 구매처(KPA)를 방문하여 도료 납품을 교섭했다. KPA가 한국의 도료 제조기술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자 한 회장은 셔윈 윌리엄스사와 맺은 대리점 계약서를 제시하며 설득했다.

 

미 8군에 도료를 납품하면서 도료의 본격 생산에 들어간 대한잉크는 미 군납의 지속유지와 제품의 품질향상을 위해 미연방규격 검사 시험기인 촉진내후성 시험기 (Weather-O-Meter)를 도입하였다. 가격이 10만 달러에 달해 대부분의 직원들이 도입을 반대했으나 한정 대 회장은 지금 당장의 이익보다 미래를 내다보고 결단을 내렸다. 촉진내후성 시험기는 한정대 회장의 믿음대로 미 군 납의 지속적인 신뢰확보와 품질향상에 큰 역할을 하였다.

 

실제로 1957년 말 주한유엔군에 납품하기로 한 100만 달러 상당의 계약이 무산위기에 처했을 때 이 촉 진내후성 시험기가 진가를 발휘했다. 해당 페인트의 견 본에 대해 일본 화학연구소가 편파적인 시험으로 판정 오류를 범한 사실을 대한잉크의 촉진내후성 시험기가 바로잡아 결국 수주를 성사시켰던 것이다. 한편 대한잉크는 1957년 8월 7일 도료의 미군납을 계기로 노루표 상표권의 보호 차원에서 특허청에 상표등록을 했다. 이어 1959년 4월 9일에는 회사의 상징인 노루마크를 특허청에 상표등록 했다.

 

6. 내수시장의 개척기

 

노루표페인트는 1962년 6월 조달청에서 우량상을 수상하는 등 정부 관계기관으로부터 품질의 우수성을 인정받기 시작했는데 대한잉크는 이를 계기로 일반 소비시장으로 수요의 저변을 적극 확대해 나갔다. 대한잉크는 1962년 7월 1일 설립된 대한주택공사의 건설 현장에 초점을 맞추었다. 때마침 국내 최초의 고층 아파트인 마포아파트 건설에 착수하고 있던 주택공사는 대한잉크에 필요 한 도료의 납품을 주문했다.

 

이때 대한잉크는 국내 도료업체들의 품질경쟁을 통해 도료를 선정할 것을 제안했다. 이는 국내 도료업계의 품질보증체계와 건전한 유통질서를 확립하고자 하는 한 회장의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이 의견을 받아들여 주택공사는 각 도료업체들로부터 견본을 받아 실험을 실 시했다. 그 결과 대한잉크의 수성페인트 ‘노루톤’이 지정되었다. 주택공사 공사현장에 노루톤이 지정된 것은 대한잉크가 건축용 도료를 시판하는 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주택공사의 모든 공사에는 노루표 제품이 사용되었고 주택공사는 공사 현장마다 대한잉크 직원으로 하여금 도장을 감리하도록 했다. 도막에 대한 하자보증을 실시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이리하여 새로 주택을 마련하려는 소비자들 사이에서 주택 도장은 노루표페인트로 해야 한다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퍼져 나갔다. 도시에서의 주택공사 도장공사, 지방에서의 농협창고 보수 도장은 국내 건축용 도료 시장에서 대한잉크가 뿌리내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노루표 페인트로 도장한 주택과 창고
그림7. 노루표 페인트로 도장한 주택과 창고

 

 

7. 2024년 밀라노 패션위크 '홍철 원더랜드'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2024 밀라노 디자인 위크’(Milan Design Week)’에서 공간 아트 홍철 원더랜드(Hong Chul Wonderland by Okuda San Miguel) 전시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방송인 노홍철과 스페인 비주얼 아티스트 오쿠다 산미구엘의 콜라보로 진행되었으며 현지 이태리 SKY TV 및 주요 언론 “토르토나 지구에서 가장 볼만한 전시”로 호평 받았다. 

 

현지 반응은 ‘역대급’으로 불릴 만큼 뜨거웠다. 평균 대기시간이 2시간에 달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렸고, 총 관람객 2만 명이 방문하여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또한 행사 기간 중 노홍철 씨가 직접 인스타그램 라이브 방송을 통해 작품을 소개하며 팬들과 소통하며 큰 화제를 모았다. 

 

세계적인 건축,인테리어 매거진인 DEZEEN과 INTERNI,  DECO 등에 소개되었고, 현지 유력 매체인 archiproducts와 이태리 SKY TV,  밀라노 가이드 등 주요 언론에서 “2024 MDW 토르토나 지구에서 가장 볼만한 전시 ”로 선정되었다.

 

행사 연출은 노루페인트의 이태리 현지 계열사인 노루 밀라노 디자인 스튜디오(Noroo Milan Design Studio, 이하 NMDS)와 컬러 연구소인 NSDS(NOROO Seoul Design Studio, 이하 NSDS)가 공동으로 진행했다. [5]

 

Hong Chul Wonderland by Okuda San Miguel
Hong Chul Wonderland by Okuda San Miguel
그림8. Hong Chul Wonderland by Okuda San Miguel

 

8. 그래서 노루페인트는 어떤 회사가 되었는가?

 

노홍철 유튜브 인터뷰 중
그림9. 노홍철 유튜브 인터뷰 중[6]

 

노루 페인트 포스팅을 시작한 계기의 유튜브 영상 중 일부를 발췌하였다. 아무런 제품 홍보도 없던 밀라노 패션 위크 전시에 노홍철은 질문한다. "왜 이렇게 해요?"

 

우리는 제품을 팔고 싶은게 아니라
색을 만드는 회사로서 사람들이 알록달록한 경험을 할 수 있으면 만족합니다. 

 

9. 맺음말

 

본문의 3~6장에 해당하는 내용은 노루페인트에서 2015년 발간한 '노루 70년 사' 문서를 편집하고 정리하여 작성되었습니다. 해당 문서의 원문을 첨부합니다.  노루 70년사.pdf [다운로드] 

 

기업의 역사와 브랜드 히스토리를 정리하면서 행복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언젠가 저도 먼 과거를 회상하며 우리의 시작을 기록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참! 본문의 요약은 챗 GPT를 이용해 정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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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내용 요약

 

더보기

본문은 노루페인트의 역사와 최근 행보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각 챕터의 요약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노루페인트·대한항공 '스텔스 도료' 개발:
    2023년 노루페인트는 대한항공과 협력하여 항공기용 스텔스 도료 개발을 추진했습니다. 스텔스 도료는 항공기를 레이더에 탐지되지 않게 돕는 특수 도료로,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기술입니다.
  2. 노루페인트의 역사:
    노루페인트는 1945년에 창업하여 70여 년간 다양한 화학 산업 분야에서 활동해왔습니다. 2006년에는 투자사업부문과 제조판매사업부문으로 분리하여 사업을 확장해 왔습니다.
  3. 창업주 한정대 회장의 생애와 창업:
    한정대 회장은 함흥에서 태어나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일본 유학을 통해 화학 기술을 배웠습니다. 해방 후, 인쇄잉크 제조업에 뛰어들어 나라의 발전에 기여하는 기업 철학을 바탕으로 노루페인트를 설립했습니다.
  4. 6.25 전쟁과 도료 사업의 진출:
    전쟁 이후 잉크 사업에서 도료 사업으로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셔윈 윌리엄스와의 협력으로 미군에 도료를 납품하며 사업을 확장했습니다.
  5. 문래동 사옥 건설과 미군 납품:
    노루페인트는 문래동에 새로운 현대식 공장을 건설하고, 미군 납품을 통해 품질을 인정받았습니다. 미연방규격 검사를 위한 촉진내후성 시험기를 도입하며 제품 신뢰도를 높였습니다.
  6. 내수시장 개척:
    노루페인트는 1960년대부터 내수시장을 공략하며 주택공사 건설 현장에 도료를 공급하고, 품질경쟁을 통해 건축용 도료 시장에서 입지를 다졌습니다.
  7. 2024년 밀라노 패션위크 '홍철 원더랜드':
    노루페인트는 2024년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노홍철과 스페인 아티스트 오쿠다 산미구엘의 협업으로 전시를 성공적으로 개최했습니다. 이는 노루페인트의 창의적인 색채 연구와 디자인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8. 노루페인트의 비전:
    노루페인트는 단순한 제품 판매를 넘어서 색채 경험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색을 통해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고자 합니다.
  9. 맺음말:
    이 문서는 노루페인트의 70년 역사와 브랜드 철학을 정리한 것이며, 그들의 여정과 앞으로의 비전에 대해 성찰하고 있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노루 70년사를 참조할 수 있습니다.

 

References

[1] https://www.news1.kr/industry/sb-founded/5249074, "항공기 스텔스를 국산기술로"…페인트업계, 특수도료 R&D로 미래준비, 뉴스1 (2023. 12)

[2] https://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040&num=21150, 스텔스 도료에 대한 고찰, BEMIL 군사세계 (2005)

[3] https://www.norooholdings.com/company/?pIdx=overview, (주)노루홀딩스 회사소개

[4] https://e-gonghun.mpva.go.kr/user/IndepCrusaderDetail.do?goTocode=20003&postYear=2023&postMonth=08,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임국정'(2023. 8)

[5] https://www.noroopaint.com/kor/pr/news_view.asp?boardidx=540&page=30&searchtype=&searchword=, 노루그룹, 2024 밀라노 디자인 위크 ‘홍철 원더랜드’ 전시 성료, 노루미디어(2024. 4)

[6] https://www.youtube.com/watch?v=FgZ2eTu7ajk, '무한도전' 때 좌절된 밀라노 꿈 드디어 실현한 노홍철 (대박패션,정지훈), 노홍철 유튜브(2024. 5)